한국 교회미술의 선구자 이춘만 조각가

새해의 영적 공간, 솔뫼성지
2026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이들이 지난 한 해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희망을 품기 위해 기도의 장소를 찾는다.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한 솔뫼성지는 그 여정에서 빛나는 공간 중 하나다.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태어난 이곳은 우리나라 천주교 신앙의 뿌리로, 겨울의 찬바람 속에서도 온기를 품은 묵상의 숲이다.
고즈넉한 소나무 숲이 내뿜는 숨결처럼 신앙과 기억, 희망이 교차하는 솔뫼성지에서 새해를 맞는 이들은 새로운 다짐과 기도의 울림을 마음 깊이 간직한다. 이곳은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우고 마음을 정화하는 깊은 영적 체험의 현장이다.
기억과 희망, 예술로 피어난 공간
솔뫼성지 한편에는 ‘기억과 희망’이라는 예술공간이 자리한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고 그의 순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된 이곳은 대성당을 중심으로 기획전시실과 이춘만미술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이춘만미술관은 예술이 기도가 되고 신앙이 형상화되는 거룩한 성소와 같다.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부드러운 빛이 조각의 거친 표면을 어루만질 때, 조각가 이춘만이 빚어낸 형상들은 고결한 침묵의 언어가 되어 관람객의 심연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기억과 희망’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기억은 고난의 역사가 새겨진 과거의 신앙을 보듬고, 희망은 예술의 숨결을 통해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밝힌다. 이춘만미술관은 이 두 가치를 예술적으로 구현한 공간이자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영적 안식처다.
원시적 숭고미로 빚은 인체와 성서
조각가 이춘만(1941~)의 작품 세계는 투박하면서도 강렬한 원시성을 담고 있으며, 인체와 성서의 은유를 결합해 인간 내면의 영성을 드러낸다. 초기 브론즈 작업에서 시작해 목각, 테라코타, 세라믹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며 성서적 은유를 심어왔다.
1980년 미국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독일, 러시아 등 국내외에서 총 20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90년 제2회 가톨릭 미술상 본상과 2018년 제31회 김세중 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를 통해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한 조각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인체 비례의 파격이다. 그리스 인체의 황금비례를 과감히 탈피한 5등신 체구와 얼굴, 손발을 강조한 독특한 조형은 인간 존재를 가장 본질적이고 낮은 곳의 형상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한국적 정서와 맞닿아 천주교가 이 땅의 신앙으로 뿌리내렸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둘째, 원시성과 영성의 결합이다. 다듬지 않은 거친 질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생명력은 인간의 고통과 숭고함을 동시에 나타낸다.
셋째, 신앙과 삶의 합일이다. 그는 끊임없이 드로잉 일기를 쓰며 영감을 기록하고, 조각을 단순한 오브제를 넘어 구도를 향한 수행의 결실로 승화시켰다.
특히 그는 한국 교회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기존 주문 제작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 성당과 성지에 세례대, 부활 촛대, 십자가의 길 등 성물을 봉헌해 누구나 일상 공간에서 작품과 마주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한국 최초로 네 차례 성 미술 개인전을 개최하며 교회미술을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예술로 확장시켰다.
신앙의 터전에서 미래를 그리다
예술공간 ‘기억과 희망’의 이춘만미술관을 나서 솔뫼성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김대건 신부 생가가 자리한다. 한국 천주교 신앙의 서사가 살아 숨 쉬는 이곳의 정적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꿈꿀 것인지 묻는다.
김대건 신부의 헌신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앙의 뿌리를 확인하며 미래를 향한 희망을 품게 한다. 2026년이라는 시간의 변곡점에서 솔뫼성지와 이춘만미술관은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예술을 통해 미래 희망을 품으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수백 년을 견뎌온 솔뫼의 소나무들이 역사의 증인인 것처럼, 이춘만의 조각 또한 그 숲의 일부가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비움으로 채우고 낮아짐으로 거룩해지는 신앙의 역설이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형상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